알베르 카뮈는 20세기 중반, 두 차례의 세계대전과 전체주의의 공포를 경험한 시대를 살았다. 그는 이러한 혼란 속에서 인간 존재의 근본적인 부조리함을 마주했고, 이를 철학적으로 승화시켰다. 부조리(Absurdity)는 의미를 찾고자 하는 인간의 열망과 무관심한 우주 사이의 근본적인 충돌을 의미한다. 카뮈는 '시지프 신화'에서 "인간의 의미에 대한 열망과 우주의 비합리적 침묵 사이의 대립"을 부조리라고 정의했다.
21세기를 살아가는 우리 역시 수많은 부조리한 상황들에 둘러싸여 있다. 기술의 발전은 편리함을 가져다주었지만, 동시에 소통의 단절과 고립을 심화시켰다. 물질적 풍요는 증가했지만, 정신적 공허함과 불안은 더욱 깊어졌다. 정보의 홍수 속에서 진실은 오히려 더 찾기 어려워졌다. 이러한 현대사회의 부조리한 상황들을 카뮈의 철학은 어떻게 바라보고, 우리에게 어떤 지혜를 제공할 수 있을까?
현대 사회에서 가장 두드러진 부조리 중 하나는 디지털 기술과 소셜 미디어가 만들어낸 '연결된 고립' 상태다. 우리는 스마트폰을 통해 전 세계와 연결되어 있지만, 실제로는 그 어느 때보다 고립되어 있다. 수백 명의 온라인 '친구'를 가진 사람들이 깊은 외로움을 느끼는 현상은 카뮈가 말한 부조리의 현대적 표현이다.
카뮈는 '페스트'에서 격리된 도시 오랑의 주민들이 경험하는 소통의 단절과 그 속에서 발견하는 연대의 가능성을 탐구했다. 오늘날 우리는 물리적으로 격리되지 않았음에도 디지털 공간에서 비슷한 단절과 고립을 경험한다. 무한한 정보와 소통의 기회 속에서 진정한 의미와 연결은 오히려 희박해졌다.
그러나 카뮈의 철학은 이러한 부조리 앞에서 절망하기보다는 반항(Rebellion)을 선택하라고 한다. 디지털 시대의 반항은 무분별한 정보 소비와 피상적 관계에 저항하고, 의식적으로 깊은 대화와 진정한 연결을 추구하는 것일 수 있다. 스마트폰을 잠시 내려놓고 직접 사람을 만나거나, 소셜 미디어의 끝없는 스크롤 대신 책을 읽는 간단한 행동도 현대적 의미의 반항이 될 수 있다.
카뮈가 강조한 '현재에 충실함'의 가치는 디지털 중독과 주의력 분산이 만연한 시대에 특히 중요하다. 내일의 인스타그램 피드나 다음 알림을 위해 지금 이 순간을 희생하는 대신, 지금 여기에 온전히 존재하는 것이 부조리에 대응하는 카뮈식 태도다.
현대 자본주의와 신자유주의 체제는 또 다른 형태의 부조리를 낳았다. 무한 성장과 소비를 추구하는 경제 시스템은 유한한 자원과 인간의 행복 사이의 근본적인 모순을 보여준다. 더 많은 돈을 벌고, 더 많은 것을 소유하면 행복해질 것이라는 약속은 실제로는 더 큰 불안과 공허함으로 이어지는 경우가 많다.
카뮈의 '이방인'의 주인공 뫼르소는 사회적 관습과 기대에 순응하지 않고 자신의 진실에 충실한 삶을 살다가 결국 사회로부터 낙인찍히고 처벌받는다. 오늘날의 성과주의 사회에서 '정상적인' 출세 경로를 거부하고 자신만의 가치에 따라 살기로 결정한 사람들 역시 뫼르소와 비슷한 형태의 사회적 배제와 불안을 경험한다.
카뮈의 관점에서 볼 때, 이러한 사회적 압력과 기대에 무조건 순응하는 것은 일종의 '철학적 자살'이다. 그는 부조리한 세계에서 자신의 가치를 스스로 창조하고, 그에 따라 살아가는 삶을 옹호했다. 현대 사회에서 이는 성공의 기준을 재정의하고, 물질적 성취보다 의미 있는 관계와 경험을 우선시하는 선택으로 나타날 수 있다.
또한 카뮈가 후기 저작에서 강조한 '연대(Solidarity)'의 가치는 개인주의와 경쟁이 지배하는 현대 사회에서 특히 중요하다. 부조리한 세계에서 인간이 할 수 있는 최선의 대응은 서로를 이해하고 돕는 공동체를 형성하는 것이다. 『페스트』에서 의사 리유가 보여준 것처럼, 세상을 완전히 치유할 수 없더라도 고통받는 이들과 함께하고 작은 도움을 주는 것에서 의미를 찾을 수 있다.
카뮈의 부조리 철학은 20세기 중반의 혼란 속에서 탄생했지만, 21세기의 복잡한 현실을 이해하는 데에도 유효한 렌즈를 제공한다. 디지털 기술의 역설, 신자유주의의 모순, 기후 위기의 불확실성 등 현대의 부조리한 상황들은 카뮈가 묘사한 부조리의 새로운 형태들이다.
부조리한 세계에서 카뮈가 제시하는 삶의 태도는 명확하다. 첫째, 부조리를 인정하고 직면하라. 현대 사회의 모순과 불합리를 부정하거나 외면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이 첫걸음이다. 둘째, 그 속에서 반항하라. 무의미함에 굴복하지 않고 자신만의 의미를 창조하는 주체적 삶을 살아야 한다. 셋째, 연대하라. 같은 부조리를 경험하는 타인들과 공감하고 연결됨으로써 고립을 극복하고 공동의 가치를 만들어갈 수 있다.
시지프가 끝없이 바위를 굴리며 자신의 운명을 받아들이고 그 속에서 의미를 찾았듯이, 우리도 현대 사회의 부조리한 상황들 속에서 자신만의 의미와 가치를 창조할 수 있다. 카뮈의 말처럼, "부조리한 상황 속에서도 행복할 수 있다고 상상해야 한다." 현대의 시지프로서 우리는 디지털 바위를 굴리며, 그 과정에서 자유와 반항, 연대의 가치를 재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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