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확신에 매력을 느낀다. 단정적인 말투, 단호한 결론, 명쾌한 해답은 때로 지성의 표지처럼 여겨진다. 하지만 조금 더 깊이 들어가 보면, 진짜 지성은 오히려 ‘말하지 않음’과 ‘보류’ 속에 존재한다. 판단을 유보하고, 아는 것과 모르는 것을 분명히 구별하며, 쉽게 단언하지 않는 태도야말로 진리에 가까이 가기 위한 첫걸음이다. 이 글에서는 확신보다 유보가 왜 더 지성적인 태도인지를 철학의 몇 가지 전통을 통해 살펴본다.
고대 회의주의자들은 인간이 진리에 도달하기 어렵다는 점을 인정하고, 모든 판단을 유보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피론주의자들은 이를 ‘에포케(epoché)’라 불렀고, 판단을 보류할 때 오히려 마음의 평정(ataraxia)에 이른다고 보았다.
이러한 태도는 소크라테스의 "나는 내가 아무것도 모른다는 것을 안다"라는 말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그는 지식을 단언하지 않았고, 계속해서 질문을 던지는 방식으로 진리에 접근하고자 했다. 무지를 인정하는 것, 그것이 지성의 출발점이었다.
포퍼의 반증주의 - 칼 포퍼는 과학적 지식이 절대적 확실성이 아닌 잠정성에 기초한다고 주장했다. 참된 지성은 자신의 이론이 틀릴 수 있다는 가능성을 인정하고, 반증 가능성을 열어두는 태도에 있다.
실용주의 - 찰스 퍼스, 윌리엄 제임스 등은 절대적 진리보다 실용적 결과를 중시했다. 지식은 항상 잠정적이며 개선될 수 있다는 열린 태도를 지지했다.
칸트는 인간 이성이 모든 것을 알 수 없다는 한계를 인정하면서도, 이성이 어디까지 가능한지를 탐구하는 철학을 펼쳤다. 그는 “이성은 비판을 통해 자신을 자각한다”고 말하며, 성찰 없는 확신을 경계했다.
비트겐슈타인은 한 발 더 나아가 “말할 수 없는 것에 대해서는 침묵해야 한다”고 했다. 즉, 언어의 한계를 넘어서 단언하려는 시도는 오히려 지성의 본질을 해치는 것이다. 그는 철저히 유보의 철학자였고, 이 침묵 속에 깊은 사유를 담았다.
우리는 때때로 모른다는 것이 부끄럽고, 판단을 보류하는 것이 미성숙하다고 느낀다. 하지만 철학이 말해주는 것은 그 반대다. 확신은 무지에서 오고, 유보는 지성에서 온다.
세상을 단순한 흑백으로 보지 않고, 여러 가능성을 품은 회색 지대를 인정하는 것. 그 가운데 스스로의 생각을 보류하고 더 깊이 파고드는 것. 그것이야말로 생각하는 사람의 자세, 즉 철학자의 자세이며 지성의 본질에 가깝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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