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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체성의 폭력 - 레비나스

마음철학

by 라브뤼예르 2025. 6. 9. 11: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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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체성의 폭력 - 레비나스

서구 철학의 근본적 오류, 전체성에 대한 강박

 

서구 철학사를 관통하는 하나의 강박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전체성(Totalité)'에 대한 욕망이다. 플라톤의 이데아계부터 헤겔의 절대정신, 하이데거의 존재까지, 서구 철학은 끊임없이 모든 것을 하나의 체계 안에 포섭하려 했다. 프랑스 철학자 에마뉘엘 레비나스(Emmanuel Levinas)는 바로 이 지점에서 서구 철학의 근본적 한계를 진단한다. 전체성을 향한 욕구는 필연적으로 폭력을 동반한다는 것이다. 포스트모더니스트로 알려진 레비나스가 어째서 포스트모더니스트인지 그가 외친 타인의 얼굴이 무엇인지 그의 윤리철학 개념을 확실히 짚어보는 시간을 가져본다.

 

마음철학
이미지 = 픽사베이

 


동일자의 제국주의

 

레비나스에게 서구 철학의 역사는 곧 '동일자의 제국주의' 역사다. 동일자란 자아가 세계를 자신의 틀로 환원시키려는 운동을 의미한다. 우리는 타자를 만날 때마다 그를 우리의 기존 범주와 개념으로 파악하려 한다. 이때 타자의 고유한 타자성(altérité)은 소거되고, 오직 우리가 이해할 수 있는 범위 내에서만 타자가 존재하게 된다.
이는 단순한 인식론적 문제가 아니다. 현실적으로 식민주의, 전체주의, 인종주의는 모두 이러한 동일자의 논리에서 기원한다. 타자를 나의 체계 안에 강제로 편입시키려는 시도, 그것이 바로 전체성의 폭력이다.

 

타자의 얼굴

 

그렇다면 레비나스는 어떤 대안을 제시하는가? 핵심은 '무한'으로서의 타자다. 타자는 결코 나의 의식 안에 완전히 포섭될 수 없는 무한한 존재다. 특히 타자의 '얼굴'은 이러한 무한성이 가장 직접적으로 드러나는 현상이다.
얼굴은 단순한 감각적 대상이 아니다. 얼굴은 "죽이지 말라"고 명령한다. 이 명령은 어떤 조건이나 근거도 없이 즉각적으로 주어진다. 우리가 타자의 얼굴과 마주할 때, 우리는 더 이상 주권적 주체가 아니다. 우리는 타자에 의해 소환받고, 책임을 져야 하는 존재가 된다.

 

윤리학이 제일철학이다

 

레비나스의 가장 혁명적인 주장은 "윤리학이 제일철학이다"라는 것이다. 전통 철학에서 존재론이나 인식론이 차지했던 근본적 지위를 윤리학이 대신한다는 의미다. 타자와의 윤리적 관계가 모든 철학적 사유의 출발점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는 칸트의 실천이성 우위와는 차원이 다르다. 칸트에게서 윤리는 여전히 이성적 주체의 자율성에 기반하지만, 레비나스에게서 윤리는 타자에 의한 근본적 타율성에서 출발한다. 나는 타자 앞에서 먼저 책임져야 할 존재로 소환된다.

 

레비나스의 윤리학에서 가장 급진적인 부분은 '무한 책임' 개념이다. 나는 타자에 대해 무한한 책임을 진다. 심지어 타자가 나에게 저지른 불의에 대해서도 나는 책임을 져야 한다. 이는 일견 비합리적으로 보이지만, 레비나스는 이것이야말로 진정한 윤리의 구조라고 본다.
이러한 구조를 레비나스는 '대속'이라고 부른다. 나는 타자를 대신해서, 타자의 자리에서 책임을 진다. 이때 나의 주체성은 타자에 의해 구성되며, 나는 타자를 위해 존재하는 '타자를-위한-존재'가 된다.

 

포스트모더니즘과의 만남과 헤어짐

 

레비나스는 종종 포스트모더니즘의 선구자로 분류되지만, 그의 사상은 단순한 포스트모더니즘을 넘어선다. 그는 서구 이성 중심주의를 비판한다는 점에서 포스트모더니즘과 공명하지만, 상대주의나 허무주의로 귀결되지 않는다.
데리다의 해체주의가 의미의 무한한 연기를 통해 고정된 의미를 해체한다면, 레비나스는 타자의 무한성을 통해 새로운 의미의 지평을 연다. 푸코가 주체의 죽음을 선언한다면, 레비나스는 타자에 의해 새롭게 구성되는 주체성을 말한다.
근대철학에 배태된 전채주의의 폭력성을 고발하고 새로운 포스트모더니즘의 시대가 도래할 것임을 예고했다는 데 그의타자 철학은 의의가 있다. 그리고 레비나스의 사상은 오늘날 더욱 절실한 의미를 갖는다. 글로벌화 시대의 문화적 충돌, 난민 문제, 혐오와 배제의 정치학 앞에서 그의 타자 윤리학은 중요한 시사점을 제공한다.
진정한 환대는 타자를 나의 조건으로 맞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타자의 타자성을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이는 단순한 관용을 넘어서는 근본적인 윤리적 전환을 요구한다.

 

철학의 새로운 출발점

 

레비나스는 우리에게 철학의 새로운 출발점을 제시한다. 더 이상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가 아니라 '타자가 있다, 고로 나는 책임진다'가 철학의 시작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는 단순한 윤리적 호소가 아니다. 존재론적 차원에서의 근본적 전환이다. 타자성에 대한 존중 없이는 진정한 사유도, 진정한 삶도 불가능하다는 것이 레비나스의 핵심 메시지다.
전체성의 폭력을 넘어서는 길은, 무한한 타자 앞에서 자신을 무화시키는 겸손에서 시작된다. 이것이야말로 레비나스가 우리에게 남긴 가장 소중한 유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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