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흔히 개인주의와 전체주의를 정반대편에 놓고 생각한다. 개인의 자유를 중시하는 개인주의가 발달할수록 집단의 절대성을 강요하는 전체주의는 설 자리를 잃는다고 믿는다. 하지만 20세기 최고의 정치철학자 중 한 명인 한나 아렌트(Hannah Arendt)는 전체주의의 기원(The Origins of Totalitarianism, 1951)에서 이러한 통념을 뒤흔드는 통찰을 제시한다. 그녀에 따르면, 전체주의는 개인주의의 반대편에서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역설적이게도 개인주의가 만들어낸 토양에서 자라난다.
아렌트가 주목한 것은 근대 사회에서 일어난 '원자화'(atomization) 현상이다. 전통 사회에서 개인은 가족, 공동체, 길드, 교회 등 다양한 중간 집단들 속에서 자신의 정체성을 형성했다. 이러한 집단들은 개인과 국가 사이의 완충 역할을 했고, 개인에게는 소속감을, 정치권력에게는 제약을 가했다.
그러나 근대로 접어들면서 이 중간 집단들이 해체되기 시작했다. 산업화, 도시화, 세속화의 물결 속에서 개인들은 점점 더 고립되었다. 겉으로는 '자유로운 개인'이 되었지만, 실제로는 뿌리 뽑힌 채 표류하는 존재가 되었다. 아렌트는 이를 "세계로부터의 소외"라고 불렀다.
이렇게 원자화된 개인들은 모순적인 특성을 보인다. 한편으로는 극도로 개인주의적이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집단에 대한 강렬한 갈망을 품는다. 소속감을 잃은 개인들은 자신보다 큰 무엇인가에 몰입하고 싶어한다. 바로 이 지점에서 전체주의 운동이 파고든다.
아렌트는 이를 "고독한 군중"이라는 개념으로 설명한다. 대중은 수적으로는 많지만 진정한 연대나 공동체 의식은 부재하다. 각자가 고립되어 있으면서도 동시에 거대한 덩어리를 이룬다. 이런 상황에서 전체주의 지도자가 등장하여 이 원자화된 개인들을 하나의 운동으로 결집시킨다.
사적 영역의 확장과 공적 영역의 쇠퇴
아렌트는 근대 사회의 또 다른 특징으로 사적 영역(private realm)의 비대화와 공적 영역(public realm)의 축소를 지적한다. 고대 그리스에서 정치란 자유로운 시민들이 공적 공간에서 벌이는 토론과 행동이었다. 하지만 근대에 와서는 정치가 사적 이익의 추구나 행정 관리의 차원으로 격하되었다.
개인들이 사적 영역에만 매몰될 때, 공적 세계에 대한 관심과 책임감이 사라진다. 정치는 전문가들의 몫이 되고, 일반인들은 구경꾼이 된다. 이런 정치적 무관심과 수동성이야말로 전체주의가 뿌리내릴 수 있는 최적의 조건이다.
아렌트의 통찰은 오늘날에도 놀라울 정도로 적실하다. SNS가 발달한 현대 사회에서 우리는 그 어느 때보다 '연결되어' 있으면서도 동시에 고립되어 있다. 개인주의는 극단으로 치달으면서도, 역설적으로 집단 극화나 포퓰리즘 같은 현상들이 나타나고 있다.
정치에 대한 무관심이 만연한 가운데, 복잡한 현실을 단순한 구호로 환원하는 정치 세력들이 힘을 얻고 있다. 중간 집단들의 약화는 개인과 거대한 정치권력 사이의 완충지대를 사라지게 만든다.
아렌트는 전체주의를 막는 방법으로 공적 영역의 복원을 제시한다. 진정한 정치란 다원적인 개인들이 공동의 세계에 대해 함께 사유하고 행동하는 것이다. 이는 단순히 투표에 참여하는 것을 넘어서, 시민들이 공적 문제에 직접 개입하고 책임을 지는 것을 의미한다.
개인주의 자체가 문제가 아니라, 개인주의가 정치적 무관심과 결합될 때 위험해진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개인의 독립성을 유지하면서도 공적 세계에 참여하는 시민성의 회복이다. 아렌트의 경고는 여전히 유효하다: 정치를 포기한 사회는 전체주의에 무력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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