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로스라고 하면 육체적 사랑만을 생각하는 단순성에서 오늘은 좀 벗어나볼까 한다. 오늘은 사회학자요 철학자인 독일 출신의 정치 이론가요 1960년대 학생운동의 이론적 배경이 된 철학자 헤르베르트 마르쿠제를 알아보고 그가 말한 에로스에 대해 공부해본다.
마르쿠제 사상은 당시 기성세대에게는 위험한 혁명론으로, 젊은 세대에게는 해방의 복음으로 받아들여졌다. 특히 그의 저서 '에로스와 문명'(1955)에서 제시한 에로스 개념은 프로이트의 정신분석학과 마르크스의 사회비판을 결합하여, 현대 문명의 억압적 구조를 폭로하고 새로운 해방의 가능성을 제시했다.
마르쿠제에게 에로스는 단순한 성적 욕동이 아니라, 인간의 근본적인 생명력이자 창조적 에너지였다. 그는 현대 산업사회가 어떻게 이 에로스를 체계적으로 억압하고 왜곡하는지 분석하면서, 진정한 해방이 무엇인지를 탐구했다. 이는 오늘날 우리가 살아가는 후기자본주의 사회를 이해하는 데에도 여전히 유효한 통찰을 제공한다.
마르쿠제는 프로이트의 문명론을 급진적으로 재해석했다. 프로이트가 '문명 속의 불만'에서 문명과 욕동의 갈등을 불가피한 것으로 본 반면, 마르쿠제는 이 억압이 역사적으로 구성된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는 "기본적 억압"과 "잉여 억압"을 구분하여 이를 설명했다.
기본적 억압은 문명이 존속하기 위해 필요한 최소한의 욕동 억압이다. 인간이 공동체를 이루고 살아가려면 어느 정도의 자제와 규율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하지만 잉여 억압은 다르다. 이는 특정한 지배 계급이 자신들의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부과하는 불필요한 억압이다.
현대 자본주의 사회에서 우리가 경험하는 대부분의 억압은 이 잉여 억압에 해당한다. 끝없는 경쟁, 성과 중심의 평가, 소비를 통한 행복 추구 등은 모두 자본주의 시스템이 요구하는 억압적 구조다. 마르쿠제는 이러한 잉여 억압이 제거된다면, 에로스가 해방되어 새로운 형태의 문명이 가능하다고 보았다.
마르쿠제는 현대 산업사회를 지배하는 논리는 모든 것을 효율성과 생산성의 관점에서 평가하는 원리라고 한다. 성능의 원칙 하에서 인간은 자신의 존재 가치를 생산력과 경쟁력으로 증명해야 한다.
이러한 성능 중시의 원칙은 에로스를 생식기적 성행위로 국한시키고, 나머지 신체 부위는 노동의 도구로 전락시킨다. 몸 전체가 쾌락을 느낄 수 있는 에로스적 존재에서, 특정 부위만이 성적 기능을 담당하는 기계적 존재로 변화하는 것이다.
더 나아가 현대인은 "일차원적 인간"이 되어간다. 비판적 사고와 부정적 사유가 사라지고, 주어진 현실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게 된다. 소비문화는 가짜 욕구를 만들어내어 진정한 에로스적 욕망을 대체하고, 사람들은 진짜 행복이 무엇인지 잊어버린다.
마르쿠제가 제시하는 해방된 에로스는 어떤 모습일까? 그는 쉴러의 "유희 충동" 개념을 빌려와 설명한다. 진정한 자유로운 활동은 노동과 놀이가 구분되지 않는 상태, 즉 일 자체가 쾌락이 되는 상태다. 에로스가 해방되면 인간의 모든 활동이 예술적이고 창조적인 성격을 띠게 된다.
이는 단순히 성적 자유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마르쿠제의 에로스는 전인적인 해방을 포괄한다. 억압된 감성이 회복되고, 자연과의 조화로운 관계가 복구되며, 인간 상호 간의 진정한 연대가 가능해진다. 그는 이를 "새로운 감성"이라고 불렀다.
마르쿠제는 특히 예술의 혁명적 잠재력을 강조했다. 예술은 현실의 억압적 구조를 넘어서는 다른 가능성을 보여주는 힘을 가지고 있다. 아름다운 것에 대한 갈망, 조화와 평화에 대한 꿈은 모두 에로스의 표현이며, 이것이 현실을 변혁하는 동력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마르쿠제의 에로스 이론은 1968년 전 세계적으로 일어난 학생운동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파리의 5월 혁명, 미국의 반전운동, 독일의 학생시위 등은 모두 그의 이론적 영향 아래 있었다. 당시 학생들이 외친 "상상력에게 권력을!"이라는 구호는 마르쿠제의 에로스 해방론을 압축적으로 보여준다.
하지만 68혁명의 좌절은 마르쿠제 이론의 한계도 드러냈다. 에로스의 해방만으로는 기존 권력구조를 전복시키기 어렵다는 현실이 확인된 것이다. 또한 성적 해방이 오히려 소비자본주의의 새로운 상품으로 전락할 위험성도 제기되었다.
마르쿠제의 에로스 이론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유효한 질문들을 던진다. 디지털 시대의 새로운 억압 메커니즘은 무엇인가? 소셜미디어와 알고리즘이 만들어내는 가짜 욕구들은 어떻게 진정한 에로스를 왜곡하는가? 끝없는 성과 경쟁과 자기계발 담론은 현대판 성능 원칙이 아닌가?
한편으로는 마르쿠제가 예견하지 못한 새로운 가능성들도 보인다. 젠더 해방 운동, 생태주의, 대안적 생활양식 등은 모두 에로스적 해방의 다양한 형태로 해석될 수 있다. 디지털 기술 역시 새로운 형태의 창조적 활동과 연대를 가능하게 하는 측면이 있다.
중요한 것은 마르쿠제의 이론을 교조적으로 따르는 것이 아니라, 그의 문제의식을 현재적 맥락에서 재해석하는 것이다. 진정한 행복과 해방이 무엇인지, 어떻게 억압적 구조를 넘어설 수 있는지에 대한 그의 탐구는 여전히 우리에게 영감을 준다. 에로스의 해방은 단순한 유토피아가 아니라, 더 인간다운 삶을 향한 끊임없는 노력의 방향을 제시하는 나침반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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