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알고 있지만 행동하지 않는 것
슬라보예 지젝(Slavoj Žižek)의 철학적 통찰은 현대 자본주의 사회의 근본적 모순을 날카롭게 드러낸다. 그의 분석에 따르면, 우리는 자본주의의 문제점을 명확히 인지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마치 그것을 모르는 것처럼 행동한다. 이러한 현상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마르크스의 물신주의(fetishism) 개념과 지젝의 독창적인 해석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오늘은 우리가 도대체 왜 그렇게 자본주의를 욕하면서도 자본주의 체제에 그토록 순응하는 행동을 하는지 알아보자.
마르크스는 '자본론'에서 상품 물신주의를 "사람들 사이의 사회적 관계가 사물들 사이의 관계로 나타나는 현상"으로 정의했다. 전통적인 해석에 따르면, 사람들은 자신들이 하는 일을 모르기 때문에 물신주의에 빠진다고 여겨졌다.
하지만 지젝은 이를 뒤집는다. 현대의 물신주의는 "그들은 그것을 매우 잘 알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마치 모르는 것처럼 행동한다"는 형태로 나타난다. 우리는 스타벅스 커피가 제3세계 농민들의 착취를 통해 만들어진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계속해서 그 커피를 마신다.
지젝에 따르면, 현대 자본주의는 더 이상 사람들의 의식을 속이지 않는다. 대신 그들의 실천을 조직한다. 사람들은 자본주의 시스템의 불공정함을 인식하면서도, 일상적인 실천에서는 그 시스템을 재생산하는 행위를 계속한다.
이는 포스트모던 시대의 독특한 현상이다. 냉소적 거리두기가 지배적인 태도가 되면서, 사람들은 "물론 이것이 문제가 있다는 것을 알지만, 그래도 어쩔 수 없지 않나?"라는 식으로 현실과 타협한다.
현대 자본주의는 자신에 대한 비판조차 상품화한다. 체 게바라의 티셔츠, 반자본주의 영화, 친환경 제품들이 바로 그 예시다. 자본주의는 자신을 비판하는 모든 것을 흡수하고 상품화함으로써 더욱 강화된다.
지젝은 이를 "이데올로기적 환상의 새로운 형태"라고 부른다. 우리는 자본주의를 비판하는 상품을 구매함으로써 자신이 저항하고 있다고 느끼지만, 실제로는 시스템을 더욱 공고히 하고 있다.
지젝은 포스트모더니즘이 자본주의의 완벽한 이데올로기적 보완물이라고 비판한다. 포스트모더니즘의 상대주의, 다원주의, 탈중심화는 겉보기에는 진보적으로 보이지만, 실제로는 자본주의의 유연성과 적응력을 높이는 역할을 한다.
모든 것이 상대적이고 절대적 진리가 없다면, 자본주의 또한 하나의 선택지에 불과하며 다른 대안과 동등한 지위를 갖는다. 이러한 논리는 근본적 변화에 대한 요구를 무력화시킨다.
현대 자본주의는 단순히 물질적 욕구를 충족시키는 것을 넘어서 문화적, 윤리적 가치를 상품화한다. 공정무역 커피, 유기농 식품, 사회적 기업의 제품들을 구매하는 것은 더 이상 단순한 소비가 아니라 윤리적 행위가 된다.
지젝은 이러한 "양심적 소비"가 오히려 더 교묘한 형태의 이데올로기적 조작이라고 지적한다. 우리는 올바른 제품을 구매함으로써 자신의 윤리적 의무를 다했다고 느끼지만, 실제로는 시스템의 구조적 문제는 그대로 남아있다.
그렇다면 지젝이 제시하는 대안은 무엇인가? 그는 무엇보다 "행동하는 것"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단순히 비판적 의식을 갖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실제로 시스템을 변화시키려는 실천적 노력이 필요하다.
또한 지젝은 보편적 진리에 대한 믿음을 포기하지 말 것을 주장한다. 포스트모던적 상대주의에 굴복하지 않고, 정의와 해방에 대한 명확한 비전을 가져야 한다는 것이다.
지젝의 물신주의 분석은 우리에게 중요한 통찰을 제공한다. 현대 자본주의의 교묘함은 우리가 시스템의 문제점을 인식하도록 허용하면서도, 동시에 그것을 바꾸려는 진정한 노력을 무력화시킨다는 점에 있다.
진정한 변화를 위해서는 단순히 "의식적"이 되는 것을 넘어서, 우리의 일상적 실천을 근본적으로 재조직해야 한다. 지젝의 철학이 우리에게 던지는 도전은 바로 이것이다. 알고 있는 것을 실제로 행동으로 옮기는 것, 그리고 환상적 거리두기를 넘어서 진정한 변화를 추구하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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