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의란 무엇일까? 법정의 냉정한 판결, 엄격한 규칙, 혹은 공리주의적인 최대 다수의 행복일까? 미국의 철학자 마사 누스바움(Martha Nussbaum)은 이러한 전통적인 정의의 개념에 도전하며, 우리에게 공감이라는 렌즈를 통해 ‘시적 정의(Poetic Justice)’라는 새로운 지평을 제시한다.
마사 누스바움은 이런 질문을 던진다.
"진정한 정의는 인간의 마음을 이해하지 않고서도 가능할까?"
오늘은 마사 누스바움이 진정 타인을 공감하고, 자신이 경험해보지 못한 것은 문학작품 등을 통해 추체험하고 이해함으로써 이성과 감정이 혼합된 정의를 구현하고자하는 누스바움의 철학을 알아본다.
누스바움이 말하는 '시적 정의'는 단순히 문학 작품 속에서 권선징악이 이루어지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그녀는 법과 도덕의 영역에서 인간적인 이해와 상상력, 그리고 타인의 고통에 대한 깊은 공감이 진정한 정의를 구현하는 데 필수적이라고 역설한다.
우리는 흔히 정의를 차가운 이성과 객관적인 사실 판단의 영역으로 여긴다. 그러나 누스바움은 이러한 방식만으로는 결코 복잡다단한 인간 삶의 진실을 온전히 포착할 수 없다고 주장한다. 아무리 완벽한 법 체계라도, 그 안에 담긴 인간의 고뇌와 맥락을 이해하지 못하면 겉핥기식 정의에 머무를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누스바움은 문학, 특히 소설이 우리가 타인의 삶을 상상하고, 경험하고, 공감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고 강조한다. 소설 속 인물들의 내면을 탐구하면서 우리는 그들의 아픔, 기쁨, 절망을 간접적으로나마 체험하게 된다. 이러한 경험은 우리 자신의 편견과 한계를 넘어서 타인의 입장을 헤아릴 수 있는 능력을 키워준다.
문학은 우리가 직접 경험하지 못한 삶의 모습들을 생생하게 그려낸다. 디킨스의 『어려운 시절』을 읽으며 우리는 19세기 영국 노동자들의 삶을 체험하고, 토니 모리슨의 『빌러비드』를 통해 노예제의 참혹함을 피부로 느낀다. 이런 경험들은 단순한 통계나 추상적 논리로는 전달할 수 없는 깊이를 가진다.
누스바움은 이렇게 문학을 통한 공감 능력의 확장이야말로 진정한 정의를 향한 첫걸음이라고 믿는다.
누스바움의 철학에서 중요한 또 다른 축은 인간의 취약성(vulnerability)에 대한 인식이다. 모든 인간은 언제든 고통받고, 상처받고, 실패할 수 있는 존재다. 이러한 보편적인 취약성을 인정할 때, 우리는 타인의 고통을 자신과 무관한 것으로 여기지 않고, 더 깊이 연결될 수 있다.
법과 제도는 때로 이러한 인간의 취약성을 간과하고, 개인의 책임을 과도하게 강조하거나 시스템의 문제점을 외면하기도 한다. 하지만 누스바움은 인간 본연의 취약성에 대한 공감이 있을 때 비로소 우리는 타인의 존엄성을 존중하고, 그들을 위한 진정한 지원과 보호를 제공하는 정의로운 사회를 만들 수 있다고 말한다.
결국 누스바움의 '시적 정의'는 공감하는 상상력을 통해 구현되는 정의다. 이는 단순히 감정적인 연민을 넘어, 타인의 복잡한 삶의 서사를 이해하고 그들의 고통에 적극적으로 반응하려는 의지다.
법조인, 정책 입안자, 그리고 우리 모두가 타인의 삶을 깊이 들여다보고, 그들의 고통에 공감하는 능력을 키울 때, 우리는 비로소 진정으로 인간적인, 그리고 진정으로 정의로운 사회를 향해 나아갈 수 있을 것다.
누스바움의 시적 정의 개념이 완벽한 것은 아니다. 몇 가지 중요한 비판들이 제기되어 왔다.
즉 공감에 기반한 정의는 자칫 주관적이고 자의적일 수 있다. 사람마다 다른 경험과 감정을 가지고 있는데, 이를 어떻게 객관적인 정의의 기준으로 만들 수 있을까?
또 효율성의 문제도 있다. 모든 상황에서 깊은 공감과 상상력을 동원하는 것은 시간과 에너지를 많이 소모한다. 때로는 빠른 결정이 필요한 상황도 있다.
문화적 편향으 문제도 분명 빼놓을 수 없다. 그러나, 이런 한계들에도 불구하고, 누스바움의 시적 정의는 현대 정의론에 중요한 기여를 한다. 그것은 정의가 단순히 추상적 원칙의 적용이 아니라, 구체적 인간 경험에 대한 깊은 이해를 요구한다는 점을 명확히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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