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사랑은 이해다'라는 다소 평범하게 들릴 수 있지만 심오한 명제에, 철학자 질 들뢰즈(Gilles Deleuze)의 독특하고 역동적인 사랑론을 통해 새로운 의미를 부여해보려 한다. 들뢰즈에게 사랑은 단순한 감정이나 관계 맺음이 아니라, 끊임없이 생성하고 변화하며, 서로를 확장하는 이해의 과정이며 사랑하는 사람은 상대의 세계를 사랑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해'란 언제나 그렇듯 쉽지 않은 것이다.
들뢰즈 철학의 핵심 개념 중 하나는 '생성'이다. 그는 모든 존재가 고정된 실체가 아니라 끊임없이 변화하고 움직이는 과정 속에 있다고 본다. 사랑 또한 마찬가지다. 사랑은 완결된 상태가 아니라, 사랑하는 두 존재가 서로에게 영향을 미치며 끊임없이 '다른 존재'로 변모해가는 과정이다.
들뢰즈는 정형화된 관계를 거부한다. 들뢰즈는 사회가 강요하는 정형화된 사랑의 형태, 예컨대 '운명적인 사랑', '완벽한 짝'과 같은 개념을 거부한다. 그는 사랑이 예측 불가능하고, 때로는 혼란스러우며, 계속해서 새로운 가능성을 탐색하는 역동적인 움직임이라고 생각했다.
사랑은 서로를 '낯설게' 만드는 힘이다. 사랑하는 두 존재는 서로를 통해 새로운 감각, 새로운 아이디어, 새로운 삶의 방식을 발견한다. 이는 나를 더 이상 이전의 '나'로 머무르게 하지 않고, 상대방과의 상호작용 속에서 끊임없이 '다른 나'가 되게 하는 힘을 가진다. 이것이 바로 사랑이 불러오는 '생성'의 과정이다.
들뢰즈와 가타리(Félix Guattari)는 인간을 포함한 모든 존재를 '욕망하는 기계(desiring-machines)'로 설명한다. 이 '기계'들은 끊임없이 무언가를 생산하고, 연결하고, 흐르게 하는 에너지 덩어리다. 사랑은 이러한 욕망하는 기계들이 서로 연결되어 새로운 흐름을 만들어내는 과정다.
사랑은 억압 없는 연결이다. 들뢰즈는 사랑이 어떠한 위계나 억압 없이 자율적인 욕망들이 자유롭게 연결되는 방식이어야 한다고 보았다. 사랑은 상대방을 소유하거나 통제하려는 것이 아니라, 상대방의 욕망과 나의 욕망이 만나 새로운 잠재력을 창조하는 것이다.
사랑은 탈영토화와 재영토화의 과정이다. 사랑하는 관계 속에서 우리는 기존의 '나'라는 영토에서 벗어나(탈영토화) 상대방과의 관계 속에서 새로운 '나'를 만들어간다 (재영토화). 이 과정은 정체성을 고정시키기보다, 끊임없이 확장하고 유연하게 만든다.
그렇다면 '사랑은 이해다'라는 명제는 들뢰즈에게 어떻게 적용될까? 들뢰즈에게 이해는 단순히 정보를 아는 것을 넘어선다. 그것은 상대방의 욕망의 흐름, 상대방의 '생성' 과정, 상대방의 '기계'가 어떻게 작동하는지를 감각하고, 느끼고, 함께 공명(resonance)하는 것이다.
사랑하는 이들은 언어로 다 표현할 수 없는 미묘한 감각, 무의식적인 욕망, 그리고 서로의 존재 방식 자체를 이해하려 노력한다. 이는 상대방의 세계로 들어가 그 안에서 함께 숨 쉬고, 함께 진동하는 것과 같다.
존재 방식에 대한 깊은 수용이 필요하다. 사랑은 상대방을 나의 틀 안에 가두려 하지 않고, 상대방의 고유한 존재 방식, 그의 욕망하는 방식 그 자체를 깊이 이해하고 수용하는 것이다. 이는 단순한 공감을 넘어, 상대방의 세계를 나의 세계와 연결하여 새로운 '관계의 영토'를 만들어내는 시도다.
들뢰즈에게 사랑은 정지된 목적지가 아니라, 끊임없이 새로운 길을 만들고, 새로운 풍경을 발견하는 이해의 여정이다. 서로의 욕망을 이해하고, 서로의 '생성'을 지지하며, 끊임없이 변화하는 관계 속에서 새로운 '나'와 '우리'를 발견하는 것. 어쩌면 이것이 들뢰즈가 우리에게 제시하는 가장 역동적이고 자유로운 사랑의 모습일 것이다.
'사랑은 이해다'라는 문장 속에 담긴 들뢰즈의 복잡하면서도 해방적인 사랑론은, 우리에게 사랑을 바라보는 새로운 시각을 제공한다. 사랑이 단순히 감정에 휩쓸리는 것이 아니라, 서로의 존재를 깊이 탐색하고, 끊임없이 함께 성장해가는 능동적인 과정임을 일깨워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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